오늘은 안중근 義士가 32세로 순국한 날
"동양 평화를 염원한 독립투사이자 經世家"![](http://nimg.nate.com/orgImg/ch/2009/03/26/ch_1238028961_343860187_0.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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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은 1910년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 장군이 일본제국주의의 적장을 사살하고 붙잡혀 적진에서 재판을 받고 순국(殉國)한 지 99주년인 날이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동북아 정세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물결이 높아가던 때였다. 동양 3국 중 일본은 재빨리 메이지유신을 거쳐 서구화로 무장해 대륙 침탈에 발 벗고 나서 대한제국을 첫 희생자로 삼았다.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으로 일제가 한반도에서 기득권을 차지했고, 대한제국은 그 지배 아래 놓인 것이다.
애천(愛天), 애인(愛人), 애국(愛國)의 정신으로 무장한 안중근은 국가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 지사인인 살신성인(志士仁人 殺身成仁)을 몸소 실천한 애국투사였다. 안중근은 법정에서 "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은 한국 독립전쟁의 한 부분이다. 개인 자격이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중장 자격으로 한 것이니 만국 공법에 의해 처리하도록 하라"고 외쳤다.
오늘의 시점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안중근이 32세의 일생을 얼마나 치열하게 얼마나 고난의 역정을 거쳤는가 하는 점이다. 그는 의병장이었고,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독립특파대장인 군사지휘관이었고, 도마라는 세례명을 가진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또 삼흥(三興)·돈의(敦義)학교 교장으로 교육구국운동에 앞장섰고, 국채보상운동을 실천한 경제인이었으며, 동양평화론을 제창한 경세인(經世人)이기도 했다. 이처럼 안중근은 나라가 어려움을 당할 때 자기를 희생하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독립을 성취하려고 한 것이다.
안중근은 대한의 독립과 함께 동양평화를 유지하고자 하는 꿈을 갖고 있었다. 안중근은 재판에서 "이 거사는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라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결행한 것"이라고 외쳤다. 그의 의거가 단순한 '암살'이 아니라 동양평화를 교란하는 침략에 항거하는 '평화'의 메시지였음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안중근은 이미 100년 전 지금 논의가 활발한 동북아 평화체제를 구상한 사상가이자 그 구체적인 실천방략까지 고민한 인물인 것이다.
오늘날 여전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민족적 과제를, 안중근은 99년 전 적지의 어두컴컴하고 스산한 감방에서 남긴 글과 서예로, 법정 진술로 웅변하고 있다. 안중근이 생각하고 실천한 업적을 되돌아보면서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한 의사의 염원을 다시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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